문화나르미
2016 년 11 월
한국현대미술 이야기 [1] - 서양화 도입 과정과 역사에 대해서
여러분은 얼마나 자주 미술관 전시에 가시나요? 문화가 있는 날이 생긴 이후,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에 미술관을 찾는 분들이 더욱 많아진 것을 느낍니다. 문화가 있는 날에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가 이중섭 화백의 전시를 찾은 많은 관람객을 만날 수 있었어요.
최근에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했다는 뉴스. 많은 분들이 접하셨을 텐데요. 미술 경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고가 경신’이란 제목의 뉴스들이 포털의 메인에 종종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미술 경매에 대해선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맥락이 있고, 뉴스들이 경매가, 위작 논란과 같은 선정적인 이슈가 주가 되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 점에 몇십 억씩 하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왜 그렇게까지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지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많을 것 같아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많은 분에게 친숙한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화백의 삶과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는데요. 그 전에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된 과정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 이중섭 – 떠 받으려는 소 (창작년도 미상)
1. 서양화의 도입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된 시기는 구한말의 암울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단순하게 ‘서양화’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화를 처음 접할 수 있을 시기가, 구한 말 일제와 서양 열강들의 침공이 시작된 때였죠.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역사에 기록된 이는 고희동(1886~1965)입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있기 전까지 궁에서 일하고 있다가 나라가 어려워지자 일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동양화로 시작했던 그는 1910년도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하고 창작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렇듯 우리나라의 서양화가 시작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힘을 잃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현실 문제에서 벗어나 창작을 통해 설움을 극복하려 했던 동기가 전반적으로 깔렸다고 할 수 있겠죠. 서양화를 접하는 통로가 일본 유학이었기 때문에 일본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 부채를 든 자화상 – 고희동 (1915) ⓒ 문화재청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서양화’는 새로운 하나의 장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었고, 전혀 다른 형태의 재료와 기술이 필요한 창작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첫 서양화가들은 배운 것을 소화해서 그다음 단계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됩니다.
또한, 이런 초기 유학파들은 조국으로 돌아와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화로 이들이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냄새나는 닭똥으로 뭘 하고 있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유화 물감 같은 재료나 결과물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너무나 생소한 문화였고,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화가들도 계속해서 창작하는 것이 어려웠겠죠.
하지만 이런 초기 유학파들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후학 교육에 힘썼고, 이들에게서 배운 제자들에 의해 한국의 서양화 역사는 이어지게 됩니다.
2. 일제 치하의 시작
초기 유학파들의 노력으로 후학들이 길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를 시작합니다. 그 당시 일본엔 ‘문부성전람회’ 약칭 ‘문전’이라고 하는 국가규모의 미술대회가 있었다고 해요. 이를 그대로 한국에서도 시작합니다. ‘조선미술전람회’라고 하는 줄여서 ‘선전’이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민족의식을 가진 이들에 의해 ‘서화협회전’ 줄여서 ‘협전’은 선전이 시작된 1922년에 앞서 21년에 시작되었지만,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선전이 점점 더 규모와 권위를 얻어가며 자리 잡아 갔다고 합니다. 총독부의 지원으로 선전은 신인 화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던 것이죠.
초기 선전엔 일본 미대 교수들이 심사위원이 되고, 한국에 있던 일본 화가들이 주로 응모하는 대회였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도구였던 셈이고 자생력이 없었던 한국 땅에선 이런 일제의 의도를 알면서도 시스템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죠. 불행한 역사입니다만, 이 선전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서양화 역사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3. 정착기
1930년대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한국의 서양화는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기 유학파들에게서 배웠던 제자들이 일본을 비롯한 미국, 프랑스 등 다른 곳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시기기도 합니다.
▲ 남향집 – 오지호(1939) ⓒ 문화재청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의 화가들은 인상주의의 기법이나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는데요. 서양에서 인상주의와 같은 경향은 사회적, 인문학적인 기반이 토대가 되는 것과 비교할 때, 그런 기반이 없이 스타일만 가져왔다는 한계를 평가받지만, 괄목할 만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죠. 위의 그림과 같이 서양화의 기법을 수용한 화가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보고 소재를 선택하기 시작합니다. 박수근과 같은 화가들이 이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요. 서양화 기법을 가져와 이를 스타일 적으로 극복하고 소재를 향토적인 데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좌) ▲ 이상 소설 전집(민음사)의 표지로 사용된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 민음사, (우) ▲론도 – 김환기(1938) ⓒ 문화재청
인상주의뿐 아니라, 후기 인상주의나 야수파, 추상주의를 수용한 화가들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서구에서 백 년에 걸쳐 변화한 현대미술의 경향을 단기간에 접하게 된 당시의 화가들은 각자의 취향과 작품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방향성이 다르게 전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경향의 스타일이 퍼지게 된 것은 당시 일본 미술계의 상황을 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퍼졌던 예술운동이 일본에 전파되었고, 일본에서도 재야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미즘에 반발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재야세력들과 한국에서 넘어간 유학생들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이들과 함께 활발히 활동했던 것이죠. 앞으로 자세히 다루게 될 이중섭, 김환기 화백이 바로 유학 시절 이 물결에 동참했던 인물들입니다.
4. 전쟁과 암흑기
하지만 1940년대를 넘어가며 한국의 미술계는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화가들의 창작활동은 엄격히 제재를 받기 시작했고, 일본 군국주의의 선동 작업에 동원되게 된 것이죠. 일제에 협력하거나 붓을 꺾어야 하는 선택이 강요되는 시기였습니다.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좌익과 우익으로 미술계도 양분화되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일본의 미술계로부터 서구의 미술 흐름을 전해 받던 한국 미술계는 광복과 함께 그 연이 끊어지고 고립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6.25의 비극이 다시 한 번 한국을 암흑으로 몰아넣습니다.
▲ 6.25 – 임옥상(1984)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간 화가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우리나라 미술계의 긍정적인 영향은 이로 인해 남북 간의 미술 교류가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인 시기에 이 같은 화가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됐던 것이죠.
5. 휴전 이후
53년도에 휴전이 되었지만 사회 분위기는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이념 갈등 속에서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은 채 주도권을 잡았고, 이 영향은 미술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죠. 선전을 대체하는 국전이 생겼고, 국전과 관련된 여러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울대 미대와 홍대 미대라는 한국 미술계의 헤게모니 싸움이 시작되는 것도 이 시기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이죠. 진정한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은 전후 시기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화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와 싸웠습니다. 한국에 남아 묵묵히 한국적인 정체성과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 화가가 있는가 하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킨 화가도 있지요. 앞으로 자세히 살펴본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화가는 이런 어려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 작가들입니다.
▲ 길 떠나는 가족 – 이중섭
작품을 더욱 잘 감상하기 위해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다음 시간엔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 얘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최근에 김환기 화백의 작품이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했다는 뉴스. 많은 분들이 접하셨을 텐데요. 미술 경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고가 경신’이란 제목의 뉴스들이 포털의 메인에 종종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미술 경매에 대해선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인 맥락이 있고, 뉴스들이 경매가, 위작 논란과 같은 선정적인 이슈가 주가 되긴 하지만 많은 사람이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한 점에 몇십 억씩 하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왜 그렇게까지 높은 가치를 평가받는지에 대해 궁금한 분들이 많을 것 같아 한국현대미술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많은 분에게 친숙한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화백의 삶과 작품들에 관해 이야기를 하려는데요. 그 전에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된 과정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 이중섭 – 떠 받으려는 소 (창작년도 미상)
1. 서양화의 도입
우리나라에 서양화가 도입된 시기는 구한말의 암울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단순하게 ‘서양화’라고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화를 처음 접할 수 있을 시기가, 구한 말 일제와 서양 열강들의 침공이 시작된 때였죠.
최초의 서양화가라고 역사에 기록된 이는 고희동(1886~1965)입니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있기 전까지 궁에서 일하고 있다가 나라가 어려워지자 일을 그만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동양화로 시작했던 그는 1910년도에 일본의 동경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하고 창작하기 시작하는데요.
이렇듯 우리나라의 서양화가 시작된 배경에는 역사적으로 나라가 힘을 잃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현실 문제에서 벗어나 창작을 통해 설움을 극복하려 했던 동기가 전반적으로 깔렸다고 할 수 있겠죠. 서양화를 접하는 통로가 일본 유학이었기 때문에 일본 화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 부채를 든 자화상 – 고희동 (1915) ⓒ 문화재청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서양화’는 새로운 하나의 장르라고 생각해야 할 것 같아요. 자생적인 문화가 아니었고, 전혀 다른 형태의 재료와 기술이 필요한 창작 활동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의 첫 서양화가들은 배운 것을 소화해서 그다음 단계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평가됩니다.
또한, 이런 초기 유학파들은 조국으로 돌아와 꾸준히 작품 활동을 계속하지 못한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화로 이들이 유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면 ‘냄새나는 닭똥으로 뭘 하고 있냐?’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유화 물감 같은 재료나 결과물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너무나 생소한 문화였고, 그림을 원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화가들도 계속해서 창작하는 것이 어려웠겠죠.
하지만 이런 초기 유학파들은 우리나라로 건너와 후학 교육에 힘썼고, 이들에게서 배운 제자들에 의해 한국의 서양화 역사는 이어지게 됩니다.
2. 일제 치하의 시작
초기 유학파들의 노력으로 후학들이 길러지고 있는 상황에서,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통치를 시작합니다. 그 당시 일본엔 ‘문부성전람회’ 약칭 ‘문전’이라고 하는 국가규모의 미술대회가 있었다고 해요. 이를 그대로 한국에서도 시작합니다. ‘조선미술전람회’라고 하는 줄여서 ‘선전’이라고 말하는 그것입니다.
민족의식을 가진 이들에 의해 ‘서화협회전’ 줄여서 ‘협전’은 선전이 시작된 1922년에 앞서 21년에 시작되었지만, 총독부의 지원을 받는 선전이 점점 더 규모와 권위를 얻어가며 자리 잡아 갔다고 합니다. 총독부의 지원으로 선전은 신인 화가들의 등용문이 되었던 것이죠.
초기 선전엔 일본 미대 교수들이 심사위원이 되고, 한국에 있던 일본 화가들이 주로 응모하는 대회였다고 합니다. 정치적인 도구였던 셈이고 자생력이 없었던 한국 땅에선 이런 일제의 의도를 알면서도 시스템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죠. 불행한 역사입니다만, 이 선전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서양화 역사가 계속 진행될 수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3. 정착기
1930년대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한국의 서양화는 한 단계 발전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기 유학파들에게서 배웠던 제자들이 일본을 비롯한 미국, 프랑스 등 다른 곳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온 시기기도 합니다.
▲ 남향집 – 오지호(1939) ⓒ 문화재청
이 시기에 이르러 한국의 화가들은 인상주의의 기법이나 시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시작하는데요. 서양에서 인상주의와 같은 경향은 사회적, 인문학적인 기반이 토대가 되는 것과 비교할 때, 그런 기반이 없이 스타일만 가져왔다는 한계를 평가받지만, 괄목할 만한 발전이라고 할 수 있죠. 위의 그림과 같이 서양화의 기법을 수용한 화가들은 자신들의 주변을 보고 소재를 선택하기 시작합니다. 박수근과 같은 화가들이 이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하는데요. 서양화 기법을 가져와 이를 스타일 적으로 극복하고 소재를 향토적인 데에서 찾으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좌) ▲ 이상 소설 전집(민음사)의 표지로 사용된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 민음사, (우) ▲론도 – 김환기(1938) ⓒ 문화재청
인상주의뿐 아니라, 후기 인상주의나 야수파, 추상주의를 수용한 화가들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서구에서 백 년에 걸쳐 변화한 현대미술의 경향을 단기간에 접하게 된 당시의 화가들은 각자의 취향과 작품에 대한 접근성에 따라 방향성이 다르게 전개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경향의 스타일이 퍼지게 된 것은 당시 일본 미술계의 상황을 보지 않을 수 없는데요.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퍼졌던 예술운동이 일본에 전파되었고, 일본에서도 재야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아카데미즘에 반발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의 재야세력들과 한국에서 넘어간 유학생들은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는 공통분모가 있었고, 이들과 함께 활발히 활동했던 것이죠. 앞으로 자세히 다루게 될 이중섭, 김환기 화백이 바로 유학 시절 이 물결에 동참했던 인물들입니다.
4. 전쟁과 암흑기
하지만 1940년대를 넘어가며 한국의 미술계는 얼어붙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화가들의 창작활동은 엄격히 제재를 받기 시작했고, 일본 군국주의의 선동 작업에 동원되게 된 것이죠. 일제에 협력하거나 붓을 꺾어야 하는 선택이 강요되는 시기였습니다.
사회의 분위기에 따라 좌익과 우익으로 미술계도 양분화되어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일본의 미술계로부터 서구의 미술 흐름을 전해 받던 한국 미술계는 광복과 함께 그 연이 끊어지고 고립되게 된 것이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6.25의 비극이 다시 한 번 한국을 암흑으로 몰아넣습니다.
▲ 6.25 – 임옥상(1984)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간 화가들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 속에서 그나마 우리나라 미술계의 긍정적인 영향은 이로 인해 남북 간의 미술 교류가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피난민들이 모두 부산으로 모인 시기에 이 같은 화가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됐던 것이죠.
5. 휴전 이후
53년도에 휴전이 되었지만 사회 분위기는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이념 갈등 속에서 친일파는 청산되지 않은 채 주도권을 잡았고, 이 영향은 미술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죠. 선전을 대체하는 국전이 생겼고, 국전과 관련된 여러 논란이 일어났습니다. 서울대 미대와 홍대 미대라는 한국 미술계의 헤게모니 싸움이 시작되는 것도 이 시기가 되겠습니다.
하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 것이죠. 진정한 한국 현대미술의 시작은 전후 시기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화가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시대와 싸웠습니다. 한국에 남아 묵묵히 한국적인 정체성과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한 화가가 있는가 하면,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 자신의 작품 세계를 계속해서 발전시킨 화가도 있지요. 앞으로 자세히 살펴본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화가는 이런 어려운 시간 속에서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고하게 구축한 작가들입니다.
▲ 길 떠나는 가족 – 이중섭
작품을 더욱 잘 감상하기 위해선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다음 시간엔 이중섭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 얘기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출처: 문화가 있는 날 공식블로그 http://pccekorea.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