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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나르미

2016 년 11 월

한국현대미술 이야기 [2] – 이중섭의 삶과 예술


▲ 이중섭(1916~1956) - 흰소(1954)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서양화가일 이중섭. 그의 소 그림은 버전을 달리하여 적어도 한 작품은 본 경험이 있을 거예요. 오늘은 한국의 고흐라고 얘기되는 이중섭의 삶과 그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 출생과 유년기

이중섭은 1916년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났습니다.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부농의 자식이었고, 형인 중석은 12년 연상, 누나는 6년 연상이었죠. 가족관계로만 보면 사랑을 많이 받았을 행복했을 성장기가 그려지네요.

하지만 이런 이중섭의 아버지는 연약하고 우울증이 있는 젊은 지주였고 말년에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불과 3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맙니다. 이때 이중섭은 아직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다고 하니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자라게 됐던 것이죠. 이중섭 말년의 정신병이 아버지로부터의 가족력을 언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제 이중섭의 형인 중석은 할아버지의 성격을, 이중섭은 아버지의 성격을 많이 닮았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미망인이 되어 중섭을 비롯한 자식들을 억척스럽게 키워냅니다. 이중섭 평생의 여성 편력이나 어머니, 아내에 대한 집착을 이런 배경에서 해석하기도 하지요. 중섭의 어머니도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고 이중섭은 외가가 있는 평양에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합니다.

□ 오산학교와 스승의 만남

이중섭은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는데요. 이때부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그림을 그리느라 공부는 등한시했고, 형 중석이 다니는 명문 평양제이고보의 입시에 탈락하게 되었죠. 그렇게 해서 들어가게 된 오산중학교는 이중섭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의 삶에 기폭제가 될 스승을 만나 본격적으로 화가로의 꿈을 꾸게 되니까요.
 

▲ 이중섭의 오산중학 시절 스승인 임용련, 백남순 부부  ⓒ 제민일보

오산학교는 남강 이승훈 선생에 의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설립된 학교였습니다. 실제로 이중섭이 학교를 다니던 시절 함석헌 선생의 수업을 들었다고 하니 그 분위기를 짐작하게 하지요. 본격적으로 화가 활동을 시작한 이중섭이 탈민족적인 추상 등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민족적인 소재를 계속해서 그려 왔던 것은 이 시절에 받았던 교육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중요한 만남은 스승인 임용련, 백남순 부부와의 만남입니다. 둘은 당시로써는 굉장히 희귀한 서양의 유학파였는데요. 위 사진의 왼쪽에 있는 임용련은 시카고 미술학교와 예일대를 졸업했는데, 예일대를 학부 1등으로 졸업하면서 당시 포상이었던 세계 일주 경비를 지원받게 되었고 각국을 돌다 파리에서 유학 중인 백남순을 만나게 된 것이죠.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오산학교의 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임용련은 첫눈에 이중섭의 재능을 알아봤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학하면서 배웠던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의 화풍을 알려주었고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아내 백남순과 함께 이중섭에게 열정적으로 미술을 가르쳤고, 이중섭은 스승의 관심 하에 자신의 재능을 단련시켰습니다. 이중섭하면 떠오르는 ‘소’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됩니다. 수많은 습작을 그려내기 위해 주변의 관찰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 학교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소는 이중섭의 관찰 대상이었던 것이죠.

학교를 졸업하는 시기, 스승은 이중섭에게 일본 유학을 권합니다. 민족의식을 강조하던 스승이었지만, 일본을 이기기 위해선 더 많이 배워야 하고, 서양 유학이 불가능했던 당시에 일본에라도 유학을 가서 이중섭의 재능이 더 만개하길 바랐던 것이죠.

이중섭의 이 시기를 보면 교육의 중요성, 스승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 시기에 자신의 적성과 재능을 찾고, 그것을 꽃 피우도록 이끄는 스승의 존재란, 역사에 남는 위인을 탄생시키는데 너무나 중요한 요소이지요. 이중섭에겐 바로 그것이 있었습니다. 제2, 제3의 이중섭이 나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지 시사하는 바가 있죠.

□ 일본 유학과 사랑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된 이중섭. 형은 이미 원산에서 사업에 성공하고 있어 지원을 받으며 유학생활을 시작합니다. 데이고쿠 미술학교에 다니던 중섭은 1년 뒤에 분카가쿠잉으로 전학을 하지요. 전의 글에서 일본 미술계의 상황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데요. 일본 미술계에 불었던 아방가르드한 경향을 반영하고 있던 곳이 중섭이 다녔던 분카가쿠잉의 분위기였죠. 중섭은 이곳에서 수학하면서 한국유학생 선후배들과도 인연을 맺게 됩니다. 문학수,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등이 그들입니다. 유학 시절 이중섭은 동방의 ‘루오’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주목을 받았다고 하죠. 트레이드 마크인 ‘은지화’를 시작한 것도 이 유학 시절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 The Court of Provience – 조르쥬 루오 (1938)  ⓒ Photo taken in Museo Soumaya(Tyler Cipriani in wikimedia)

유학 시기의 이중섭에게 가장 중요한 만남은 평생의 아내가 될 야마모토 마사코와의 만남입니다. 같은 분카가쿠잉의 학생이었던 마사코와 이중섭은 열렬히 사랑했고, 일본에서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됩니다. 침략한 일본의 여인과 만나는 이중섭이나, 식민지의 남자와 만나는 마사코의 상황이나 서로에게 쉽지 않은 상황이었겠지만, 둘의 사랑은 이런 한계는 모두 극복할 정도로 뜨거웠던 것 같아요.

분카가쿠잉을 졸업하고 프랑스 졸업을 생각하던 중섭은 전쟁 발발과 형의 만류로 인해 생각을 접고 일본 미술계에서 잠시 활동합니다. 보수적인 일본의 ‘선전’에 대응되는 ‘자유전’에 출품해 수상하기도 하죠. 1943년 귀국한 이중섭은 가족들이 있는 원산으로 왔고, 마사코는 1945년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이중섭을 따라 옵니다. 둘은 정식으로 결혼해 마사코는 ‘이남덕’으로 개명합니다. 둘의 결혼은 1945년 5월로 광복을 3개월 앞둔 시기였습니다.

□ 광복에서 전쟁까지

광복 뒤의 혼란한 틈 속에 중섭은 창작활동을 계속 이어가지만, 1946년 태어난 첫 아이를 디프테리아로 잃는 상처를 입기도 하지요. 마침 그는 고아원에서 일하고 있는 때였는데, 이 상처를 잊기 위해 아이들이 등장하는 수많은 그림을 그려내기도 합니다.
 

▲ 이중섭(1916~1956) - 봄의 어린이 (1953)

아시다시피 광복에서 전쟁까지의 한반도의 혼란한 상황은 이중섭을 가만 놔두지 않았습니다. 이중섭이 살고 있던 원산은 북에 있었기에 김일성과 북한 정권이 장악하기 시작했는데요. 중섭의 탈정치적인 성향 때문에 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중섭의 형은 친일, 부르주아로 몰렸고, 중섭 또한 부르주아 화가로 매도 되었습니다. 더욱이 일본인 아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 당시의 상황에 좋아 보이지 않았겠지요. 이데올로기의 선전물 작업을 강요당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중섭은 다른 동료 예술가들과는 다르게 월남을 곧바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노모에 대한 책임감이나 성격 등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전쟁은 1950년 터졌고, 가까스로 피난길에 오릅니다. 중섭의 노모는 고향에 남았지요. 중섭은 슬퍼하며 그때까지 작업했던 작품들을 노모에게 남기고 떠났다고 합니다.

□ 전쟁 시기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뒤로 중섭의 삶은 계속된 고난으로 이어집니다. 1951년부터 짧은 제주도에서의 생활을 하는데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바다에서 게를 잡아먹으며 연명하는 삶은 생존 자체로도 힘든 생활이었음을 짐작게 합니다. 위장이 안 좋았던 아내 남덕은 조개를 가루를 내 먹는 것으로 버티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 이중섭(1916~1956) -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52년 다시 부산으로 돌아온 중섭은 부둣가에서 막노동하며 연명하는 삶을 이어갑니다. 도쿄 유학 시절 열정으로 시도했던 ‘은지화’는 이 시기에 있어 그림을 그릴 종이와 캔버스가 없어 겨우겨우 담뱃갑 속의 은지를 이용해 그려야‘만’ 했던 예술가의 생존 투쟁을 보여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이중섭의 은지화는 생전에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고난 속에서 꽃을 피운다는 예술가의 삶의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겠지요.
 

▲ 이중섭(1916~1956) - 물고기와 아이들 (은지화)

52년 부산으로 돌아온 뒤, 결국 아내 남덕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넘어가기로 합니다. 당시 일본은 한반도에 있던 일본인들을 다시 데려가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중섭과 같이 일본인과 결혼했던 많은 남성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고, 이런 틈 속에 중섭의 아내와 자식들도 포함됐던 것입니다.
아들로서, 가장으로서 자신의 무능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상황. 이중섭 말년의 폭음과 정신분열의 시작은 이 시점일 텐데요. 결국, 아내와 자식들과의 재회는 중섭이 세상을 떠나기 전 단 한 번만 이뤄집니다.

□ 말년과 사망까지

부산과 대구, 통영 등 아내가 일본으로 떠난 뒤, 이중섭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닙니다. 사실 전후의 피폐한 시기에 예술가들이 안정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분명한 것은 중섭의 주변에는 끊임없이 그가 창작하길 바랐던 조력자들이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술에 절어 있다가도 그림을 그릴 공간과 화구들을 장만할 돈을 마련해주는 지인들이 있었죠.

하지만 어려웠던 시기, 이런 중섭에게 달라붙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해요. 서로서로 주고받고 얻어먹는 문화가 있었을 것도 사실이지만, 경제관념이 극도로 없었던 중섭에게 의도적으로 달라붙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하죠. 그래서 중섭은 항상 빈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3년 일본에 잠시 다녀온 뒤, 중섭은 그림을 팔아 여유가 생긴 뒤 다시 일본에 돌아가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작업에 몰두합니다. 이런 그의 노력에 김환기, 구상 같은 지인들이 힘을 모아 55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지요.
 

▲ 이중섭(1916~1956) - 길 떠나는 가족

그때 출품된 작품들은 피난민의 삶의 주제가 되는 그림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친숙한 소와 관련된 그림들도 많았죠. 이중섭의 개인전은 당시에도 화제가 됐었고 성황리에 치러집니다. 45점이 출품되어 26점이 판매예약 되었으니 중섭은 희망에 찼지요.
하지만, 기대는 오히려 더 큰 실망을 가져다주는 법일까요. 판매 예약이 전부 판매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상, 김종문, 김환기 등이 수금에 나섰지만 원활히 이뤄지지 못했죠. 이중섭도 함께 수금에 나서다 돈을 받으러 다니는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는 경우도 많았다지요.

이 상처를 안고 대구로 돌아간 중섭은 정신병이 발병하기 시작합니다. 지인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에 입원당하기도 하지만, 한번 나빠진 병세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는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지나친 음주로 인한 간의 손상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죠.
1956년 적십자 병원에서 이중섭은 사망합니다.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시체실에 있은 지 3일 뒤에나 사람들에게 그 사실이 알려졌다고 합니다.
 

▲ 이중섭(1916~1956) - 황소

1916년에서 1956년까지 짧은 생애와 함께 이중섭이 살아온 시기는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가장 비극적인 소용돌이에 있던 때였습니다. 이중섭의 그림이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다가왔던 이유에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그가 관심을 가졌던 소와 아이들, 닭, 게 등과 같은 친숙한 요소들로 표현된 세계 때문이겠죠.

그의 삶을 살펴보고 그림을 다시 보면, 예전과는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됩니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의 유년기나, 그가 사랑했던 아이들이. 혹은 그가 꿈꿨던 세상들이. 황소의 얼굴에서 그가 관찰하던 오산의 소와 전쟁 중에 보았던 피난민들의 소, 혹은 이중섭 그 자신의 모습들이 비칩니다. 슬프고 고단한 와중에서도 ‘헤에...’라며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느껴집니다.

위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황소와 눈을 마주치며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되지요. 극도로 궁핍했던 시기가 지났음에도 아직 이중섭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에는 겉모습과는 달리 아직도 우리의 마음이 궁핍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출처: 문화가 있는 날 공식블로그 http://pccekorea.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