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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나르미

2016 년 12 월

한국현대미술이야기 [3] – 박수근의 삶과 예술


▲ 박수근 - 노상 ⓒ 박수근미술관

소박하면서도 건조한, 따뜻하면서도 아련한, ‘국민화가’로서 가장 토속적인 소재와 화풍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한 박수근. 오늘은 그의 생애를 살펴보는 시간 가져 보겠습니다.

출생과 유년기
 
박수근은 1914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습니다. 3대 독자로 태어난 박수근은 위로 세 명의 누나가 있던 막내였으니 많은 사랑을 받았겠지요. 어릴 적 박수근의 집안은 매우 유복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일곱살이 되어 보통학교에 진학한 시점에 아버지가 광산업에 진출하다 실패하고 맙니다. 더욱이 홍수가 나서 피해까지 입게 되고요. 악재가 겹치면서 박수근의 집안은 그야말로 점점 쇠락하게 되는데요. 그 때문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로 진학조차 하지 못하게 됩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박수근은 미술에 재능을 보여 선생님이 인정하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만, 집안의 가세가 기울면서 미술과 관련된 정규교육을 계속 받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차이는 당시 서양화를 시작하던 한반도의 서양화가들과 박수근이 다른 길을 걷게 되는 배경이 되는데요. 이중섭과 같이 집의 지원을 받고 일본에 유학을 떠나 서양화를 배운 다른 화가들과 달리, 박수근은 오로지 독학으로 자신의 화풍을 확립하게 된 것이지요. 예술과 창작의 영역에서도 출신 학교 등이 상당 부분 위치를 결정하게 되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박수근이 걸어온 길과 현재의 위치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런 박수근이 화가의 꿈을 꾸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린 시절 밀레의 ‘만종’을 대하게 되면서였다고 해요. 어린 박수근은 ‘하느님 나는 이 담에 커서 밀레와 같이 훌륭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 만종 – 장 프랑수아 밀레(1857-1859)  ⓒ 위키미디어

만종을 보며 화가의 품을 꾼 박수근은 나중에 진짜 화가가 됐을 때 시골의 풍경, 시장, 일하는 여인들과 같은 소재들을 주로 선택해서 그리게 됩니다. 어릴 적에 계기를 주는 사건이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그의 삶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화가로서의 시작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박수근을 지지하고 응원해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보통학교의 교장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인데요, 이들의 응원을 받으며 박수근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에 정진했고, 결실이 맺어집니다. 18세의 나이,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하게 됩니다.
 

▲ 박수근 - 봄이 오다 (1932) ⓒ 박수근미술관

그러나 이 이후로 계속해서 세 차례 선전에 낙선하고 마는 박수근. 이 당시 박수근의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1935년에 돌아가시고 말죠. 창작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음이 예상됩니다. 그 뒤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박수근은 이 시기 춘천, 경기도 인근에서 옮겨 다니며 지낸 것으로 알려지는데요. 36년부터 43년까지 빼놓지 않고 선전에 입선하게 됩니다. 박수근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는데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생계형 화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이 박수근의 명성에 흠을 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박수근은 돈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습니다. 박수근은 1940년 김복순과 결혼한 뒤, 바로 평남도청 사회과의 서기로 취직을 하지요. 흔히 예술가들이 가족이나 경제적인 면에 선을 긋고 자신의 작품세계에만 몰두하는 경우도 많지만, 박수근은 그런 화가는 아니었습니다. 결혼한 뒤 취직을 하고 자식들을 낳아서 기르는 어찌 보면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과정을 밟았죠. 차이가 있다면, 이런 과정에서도 그림을 꾸준히 계속 그렸다는 겁니다.
 
광복이 찾아온 뒤에는 금성의 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가는데,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이북지역이었던 금성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고, 기독교도이자 민주당 의원이었던 박수근은 감시의 대상이었던 것이죠. 여기에 6.25가 발발하자 박수근은 가족을 두고 먼저 서울로 남하합니다. 가족들과 헤어지고 이산가족이 될 위기였는데요. 다행히도 아내와 자식들도 남하하여 상봉하게 됩니다.
 
전쟁 시기에 대다수 많은 사람이 궁핍했고, 박수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미군의 PX에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당시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박완서는 자신의 소설에 박수근을 등장시키지요. 이때 모은 돈을 가지고 박수근은 창신동에 자신의 집을 마련하기까지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가운데서도 53년 국전에 박수근은 자신의 작품을 두 편이나 출품해서 한편은 특선으로 뽑힙니다. 이듬해 54년도 국전에도 두 편을 조선미협전에도 또 두 편을 출품하지요. 이 시점부터 박수근은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 화가를 시작합니다.
 

▲ 박수근 - 노상 (1955) ⓒ 박수근미술관

1956년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서울 위치)안에 개점한 반도화랑에서 기념품 느낌의 그림을 파는 것이 그 이후 박수근의 생계 수단으로 알려졌는데요. 반도화랑을 통해 박수근의 그림을 접한 미국인 밀러 부인, 미 대사관 문정관 부인인 마이아 핸더슨 등의 지원으로 계속해서 창작 활동과 생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리아 지머맨 같은 미국인 수집가도 그의 그림을 좋아했다고 하죠. 이러한 외국인들의 관심은 그가 그림을 독학으로 익혔던 것도 이유로 꼽을 수 있겠습니다. 당시 서양화를 일본 유학으로 공부하고 돌아왔던 화가들은 일본에서 유행하는 서양화 스타일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박수근은 그럴 수 없었던 것이죠. 스타일도 개성적이었고, 그가 선택하는 소재 또한 토속적이었기에 외국인에게서 이국적인 박수근의 그림이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외국인들의 관심을 얻기 시작했던 박수근. 58년도에는 뉴욕에서 열린 현대미술전에 박수근의 그림이 걸리기도 하는데요. 그림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외국 유학은커녕 해외로 나가 보지도 못했던 박수근이 서양인들에게 인정받고, 자신의 그림이 해외 갤러리에 전시되는 것은 어떤 느낌을 주었을까요. 생계로 힘든 순간에도, 전쟁의 피난 와중에도 꾸준하게 선전, 국전에 작품을 출품했다는 그의 행적은 화가로서의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단면입니다. 이중섭과 비교할 때 그림을 ‘파는’것에 대해 부끄러워했던 이중섭과 달리, 박수근은 자신의 실력이 인정받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런 자긍심들이 모여 창작된 57년도 국전에 출품한 100호짜리 야심작 <세 여인>은 아직 국내에선 인지도가 높지 않았기 때문인지 낙선하고 맙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박수근이 심한 음주를 하게 되고 58년도에는 아예 국전을 외면해 버렸다고 하는데요. 쌓아 올렸던 자긍심과 독학 출신으로서의 열등감 등이 충돌하면서 얻게 된 충격이었던 거겠죠.
하지만 이런 충격으로 인한 슬럼프도 오래가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59년에 국선 추천작가로 뽑힌 박수근은 그림을 출품했고 조선일보 주최의 제3회 현대작가 초대미전에도 출품합니다.

말년과 사망까지
 
50년도 후반에서 65년도 사망에 이르는 시기는 화가로서의 박수근이 자신의 화풍이 확립되고 사회적으로도 인정받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술용어로 마티에르(matière. 영) material)는 단어 그대로 재질감을 뜻하는 데요. 박수근의 그림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독특한 재질감이지요. 흔히 화강암의 질감을 닮았다고 하는 이 독특한 그만의 마티에르가 확고하게 만들어진 것이 이 시기입니다. 박수근은 59년도에 이어 60년도에도 국전 추천작가로 그림을 출품했고, 62년도에는 심사위원으로 추대됩니다.
 

▲ 박수근 - 농악(1962) ⓒ 현대화랑

하지만 이런 가운데 생계의 어려움으로 백내장을 치료하지 못하던 박수근은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맙니다. 이런 고통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이는 다시 신장과 간염의 원인이 됩니다. 1965년 5월 6일에 결국 박수근은 세상을 떠나는 데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작품 세계와 논란

화강암을 닮은 마티에르와 토속적인 소재. 검색창에서 박수근의 그림을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듯이 비슷한 모습의 작품들이 많이 보이지요. 게다가 박수근은 동일한 소재를 거듭해서 그리는 경우도 많아 굉장히 흡사한 작품들도 보이는 데요. 주로 야외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던 박수근의 작품 세계. 이 또한 그가 그림을 독학으로 시작했던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박수근 - 사람(데셍) ⓒ 박수근미술관

실내에서 정물이나 사람 모델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는 아카데믹한 방법과는 달리, 박수근은 밖에 나가 관찰하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거듭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박수근의 그림에서 사람들의 모습은 대부분 정면이 없이 뒷모습이나 측면인데요. 화가 개인의 성향뿐 아니라 이런 작업 과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겠죠.
 
고대 벽화를 보는 것처럼 평면적이고 원근이 없는 구도도 박수근 그림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왼쪽)▲ 박수근 - 노상 ⓒ 박수근미술관, (오른쪽)▲ Maler der Grabkammer des Sennudem The Yorck Project 10.000 Meisterwerke der Malerei. DVD-ROM, 2002 ⓒ 위키미디어

고대 벽화의 평면적인 구도나 원근감이 없는 것은 그러한 개념이 발달되기 전이라 나타난 특징이라면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이러한 구도가 계산에 의해 사용됐다는 것이 그의 작품 전반에 나타납니다. 작품 세계가 성숙할수록 이러한 구도는 더 계산적으로 사용 되지요. 캔버스의 위와 아래를 구분해 위는 후경 아래는 전경과 같은 식으로 배치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박수근 그림의 특징인 화강암을 닮은 마티에르는 평소 작가 스스로가 불상과 조각 등 석조 유물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만, 궁핍한 시절에 질이 나쁜 종이에 그림을 그려야만 했던 박수근이 거친 질감에 대해 접하다 이것을 표현으로 승화시켰을 것이란 해석도 있습니다. 전자든 후자든 경험적인 부분에서 느낀 감정을 자신의 표현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는 분명하죠. 이런 질감에 대해 호암미술관에서 과학적인 분석을 한 적이 있는데요. 평균적으로 8층의 덧칠이 칠해져서 만들어낸 질감이라고 합니다.
 
단색조의 특징도 시작은 채색물감이 부족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시작되었다가 자신의 스타일로 고착화 되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죠. 이렇게 생각해 보면 박수근의 특징은 어렵고 부족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든 계속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 환경을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작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 박수근 - 빨래터 ⓒ 박수근미술관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수근의 이런 화풍은 논란을 만드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2007년 서울옥션에서 낙찰가 약 45억에 박수근의 <빨래터>가 경매에서 낙찰되었고 이는 당시 최고의 액수로 큰 화제가 되었는데요. 그 이후 위작 논란에 휩싸이면서 이와 관련된 재판이 2년여를 끌었고, 위작은 아니란 평결이 나왔지만 이미 너무 구설수에 올라 버렸던 거지요.
박수근의 화풍이 개성적이지만, 단순하기도하고 비슷한 요소가 있는 작품들이 많아 수많은 위작이 제작되어 시중에 유통되었습니다. 미술품의 거래와 경매, 검증 시스템이 성숙하지 못한 환경에서 이러한 일들이 거듭되면서 박수근의 작품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연구보다 논란성 이슈만 거듭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 박수근 - 나무와 두 여인 ⓒ 박수근미술관

소재와 시대적인 관점에서 박수근 그림에 대한 한계성에 대해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림에도 유행이 있어 토속적인 소재에 머물러 있는 박수근의 그림이 전보다 평가를 덜 받는 경향도 있지요. 그러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로서 어려운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꿈을 정진한 박수근의 인생은 많은 부분에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박수근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했던 이야기를 들어보죠.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 할머니는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을 추구했던 작가 박수근.
하지만 그의 작품은 너무나 특별하게 역사에 기억되고 있습니다.

출처: 문화가 있는 날 공식블로그 http://pccekorea.blog.me